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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구속 |
아름다운 구속
수석교수 지대운.
― 다시 온 연수원
삼년 만에 다시 찾은 일산 벌, 메마르고 희뿌연 세찬 바람이 온 몸을 휘감는다. 먼 따뜻한 남쪽에서 네 계절을 지낸 탓인가 북녘의 삭풍은 살갗을 팽팽하게 당겨놓는다. 한강을 바라보며 휑뎅그리 서있는 연수원 청사 앞의 여전한 호수는 얼음에 덮여 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연수생들의 그림자들만으로 청사는 서늘하고 적막하다. 눈에 설지 않은 건물 곳곳에서 만나는 낯익은 직원들, 잠시 동안 과거로 돌아간 착각에 빠진다. 발령 첫 주 새벽의 뜨거움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핏대를 세우며 합의하다가 근거가 부족하면 들먹였던 선현 교수, 내가 바로 그로 돌아왔다. 책속에서 글자로만 존재하던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박제가 아니었던가. 문득 거울을 보면 아직 세월의 흔적이 많지 않고, 젊은 연수생들과 함께 뒹굴 힘은 여전한데...정체성이 어지럽다.
부임 첫날 많은 교수들 모두 손을 잡으며 인사하나, 아는 얼굴은 그리 많지 않다. 무림의 고수들이라 황량한 분위기에 잘 맞는 무채색의 차림과 냄새를 흘린다.
곧, 한껏 들뜨고 상기된 연수생들이 발걸음을 동동거리며 부산하게 모여든다. 그 기세에 청사 곳곳의 어둔 그림자는 간 곳 없고 젊음이 넘친다. 그런데, 모두 아들 딸로 보인다. 과연 세월의 더께는 눈에 먼저 내려앉은 것이다.
― 어느 교수의 일상
재판만 하다가 갑자기 얻은 교수라는 호칭의 쑥스러움은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싱싱함이라는 빛나는 옷을 입은 연수생들과의 첫 만남에는 부끄러움이 앞서기까지 하더군요. 짐짓 태연한 척 하였지만 연수생과의 면담에 말이 헛돌고 더듬기까지 하였습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빨리 씻어버리기 위해 조모임을 입소 다음 날로 정하였습니다. 신림동 고시준비생들이 그토록 한번 받아보기를 고대한다던 폭탄주를 만들어 돌립니다. 꼭짓점 원칙이라는 억지 이론에 의해 연수생 한잔 마실 때 교수는 두 잔씩을 마시고야 맙니다. 연수생들은 교수 망가지는 모양을 보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러나, 정신력으로 버팁니다. 고만고만한 연수생들의 폭탄사를 인내심으로 들어줍니다. 드디어 연수생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연수생들로부터 쉰내 난다는 말 듣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갈고 닦아온 노래책에 다섯 단위로 기재된 최신 곡을 선택하고 올라가지도 않는 목청을 한껏 높여 봅니다. 물론 노래실력과 상관없이 앙코르곡은 당연한 다음 순서입니다. 옆에 있던 술 취한 남자 연수생이 형이라고 불러도 되느냐며 한번만 꼬옥 안아달라고 슬며시 기대옵니다. 돋는 소름에도 불구하고 연수생과 교수와의 벽이 무너진 좋은 징조라 생각하며 기꺼이 들어줍니다. 술 취하여 경황없는 중에도 연수생들의 마무리 요청에 자네들은 지도교수와 끊을 수 없는 질긴 인연으로 구속되었다며 용기와 힘을 줍니다.
강의에 앞서 교수들끼리 합의를 합니다. 연수생들에게 균질한 강의를 하기 위한 것이지요. 옛날 어느 초임 교수가 합의 중 선배 교수들로부터 당한 질타에 의한 자신의 능력부족에 대해 심한 자괴감으로 몇 날 밤을 남몰래 피눈물을 흘렸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교수들에게는 진검승부를 펼쳐 보이는 살벌한 시간입니다. 그런 연유로 진검승부에 앞서 무림고수인 교수들은 보검의 날을 벼리기 위해 해당 부분을 적어도 세 차례 이상 연구합니다. 승부가 미진한지 합의가 끝나면 바로 날카로운 메일 날리기가 강의시작 전까지 무차별 지속되고 나서야 무장을 해제합니다. 긴장된 합의와 메일교환이 마무리되면 바로 무공을 전수할 준비에 들어갑니다. 강의는 교수 머릿속에 내용이 들어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알지 못한다고 추정되는 어린 연수생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교수는 강의내용을 자신의 말로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선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강의에 앞서 강의안을 수차례 더 정독하면서 알기 쉬운 전수방법을 궁리합니다. 드디어 강의안이 헤질 정도로 익힌 실력으로 무장하고 연수생들 앞에서 열변을 토합니다.
칼솜씨만 가르쳐주면 지루해하므로 중간 중간 재미있어야만 하는 농담이나 교수의 경험, 인생관이 녹아든 마음을 살찌울 떡보따리도 풀어놓습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의 양식을 늘어놓는 것은 연수생들을 위함이 먼저이나 교수 스스로도 지나온 궤적을 되돌아보고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한 다짐의 의미도 큽니다. 이러한 언약을 통해 교수도 연수생들과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이지요.
연수원에서의 근무기간을 마치고 재판부에 복귀하여 있을 때에도 제자들은 쉼 없이 하자보수를 요청합니다. 그 부실시공이 원래 잠재된 것일 뿐 연수원 기간 동안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없지 않으나, 열심히 지도하지 못한 때문이라 자책하면서 지도교수의 끈을 놓지 못하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고 조언합니다. 하자 보수 요구도 않는 개업한 제자들에 대한 괜한 걱정에 잠을 설칩니다. 더구나 배우자까지 지도교수에게 해결해 달라는 몇몇 제자의 말에 질긴 구속의 끈은 드디어 숨을 조여옵니다.
연수원 교수경력 사년 만에 처음으로 대강당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일정을 받고 오랫동안 내용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대강당의 의자는 안락하여 잠자기에 특히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연수생들의 취침을 방해할,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그 동안 쌓아놓은 내공을 들인 유익한 이야기를 꾸미기위해 열심히 강의안을 준비하고 열정을 다해 강의하였으나 역시 적지 않은 수의 연수생의 영혼은 그곳에 있지 않더군요. 연수원 대강당 의자를 딱딱한 걸로 바꿀 수는 없을까 심각해져 봅니다.
― 연수원에 보내는 편지
제자들아 너희들의 지금 자리와 값없이 누리는 모든 것이 백성들의 피땀과 한 묶음된 의사에서 연유하였음을 잊지 말고, 너희는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기에 힘쓸지니.
우리에 앞선 수많은 기라성 같은 선현 법조인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법조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력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우지 못하고, 당사자의 고통을 외면하며, 지식에 매몰된 채 진실에 눈감고, 자신의 눈앞 이익만을 위해 멀리 내다보는 용기와 지혜를 버린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는 어떤 가치를 지킬 것이며 무엇을 위해, 어떤 법조인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고 있는가. 내가 간직한 나의 다짐은 과연 누구에게도 합당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그 약속을 굳건히 지켜나갈 믿음과 용기는 있는가.
더구나, 나의 지금 위치는 누구의 도움과 복으로 얻어진 것인가. 나는 이같이 많은 복 누림을 늘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그토록 많은 도움으로 연수생이라는 자격을 얻은 나는 그 받은 도움과 복의 십분의 일이라도 베풀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고 탓하며 아래로 행하기를 주저하면서도 마치 자신만이 다 이룬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지식만이 최선인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함부로 재단하고 무시하며 행동한 적은 없는가. 나는 내속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을 쌓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한번이라도 내 주위사람에게 눈길조차 준 적이 있는가.
제자들아, 연수원과정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에는 너희들의 어깨가 아직 여물지 못함을 잘 아노라. 그러나, 어느 교수가 평생의 구속으로 거듭난 연수생이 잘못되기를 바라겠으며 하물며 멸망의 길을 가르치겠느뇨. 너희 중 누가 어린 자식이 사탕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험한 바다를 헤쳐 나갈 길을 알려달라는데 풍랑에 침몰할 길을 알려주겠느뇨. 교수들이 너희를 지나칠 정도로 권면함은 오로지 연수생들을 보석같이 아름답고 올바른 법조인으로 만들고자함에 있을 뿐이노라. 교수들의 제자 사랑은 한이 없으니 교수들의 사랑 안에서 너희들도 모든 노력을 다해 힘써 실력과 아울러 겸손함을 키울지니. 이는 첫째는 너희 자신을 위함이요 둘째는 너희를 믿고 분쟁의 해결을 의뢰할 백성을 위함이라. 백성을 위함이 결국 너희들에게 크나큰 믿음과 신뢰의 복으로 돌아올 것임을 명심하라.
다만, 너희들은 책속의 지식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지혜를 취하여 한 몸이 되도록 힘쓸 것이라. 머릿속의 많은 지식은 자신의 눈을 가릴 수 있으나, 지식에서 얻은 가슴속의 지혜는 우리의 눈을 더 멀리 넓게 밝히 보게 하느니라. 매일매일 아름다운 말로 감사하고, 늘 확신을 가지고 밝은 미래만을 이야기 하며, 서로 축복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말고, 마음속의 견고한 성을 끊임없이 부수어라. 너희들이 마음속에 견고한 성을 쌓고 팔짱을 끼고 있는 한 주어지는 복을 받지 못하리라. 너희가 남에게 손을 내밀 때 그 손에 복은 내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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